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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션

고스 룩의 버라이어티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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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스 룩의 버라이어티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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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탄을 칠한 듯한 까만 눈매와, 입술에는 블랙 매직을 바르고, 밀가루를 뒤집어 쓴 것처럼 창백한 피부에 길고 풍성한 흑단 같은 머리의 여인들이 아찔한 높이의 성곽 계단을 내려와 거리로 직행한다. 피시넷 스타킹 혹은 라텍스 레깅스를 신은 그녀들의 목에는 묵직한 금빛 체인 목걸이가 흔들리고, 블랙 레이스 드레스의 실루엣 뒤 로는 까마귀가 날아 다닌다… 이건 공포 영화의 한 장면이 아닌 바로 이 번 가을, 겨울 컬렉션이 열린 쇼장의 분위기다. 이번 가을, 높이 솟은 패 션계의 첨탑 위에 칩거하는 디자이너들은 단체로 어두운 마법에 걸린 듯이 동시에 고스족의 매력에 빠져버렸다.

18세기 고딕 문학에서 시작된 고스 문화는 1980년 영국을 중심으로 하나의 언더그라운드 문화로 성장했다. 물론 고딕이라는 단어를 들었을 때 가장 먼저 머리에 떠오르는 중세의 건축 양식과도 어느 정도 연관이 있지만, 고스 문화는 런던의 뒷골목과 깊은 관계가 있다. 포스트 펑크 록에서 뻗은 여러 개의 가지들 중 하나인 ‘고딕 록’을 지켜보던 한 저널리스트가〈Sounds〉매거진에서‘고스(Goth)’란 단어로 이 문화를 정의하면서 새로이 하나의 라벨을 달게 된 것. 그 후 고스 문화는 문학, 영화, 음악, 만화 등 다양한 모습으로 변신하며 비주류 문화 중에서 도 꽤나 무게감 있는 주류로 자리 잡게 되었다. 하지만 가장 두드러진 족적을 남긴 것은 바로 고스 패션. 영화 〈아담스 패밀리〉속 안젤리카 휴스턴이나〈비틀 주스〉속 위노나 라이더, 독특한 세계관을 지닌 소녀의 이야기〈이상한 에밀리〉, 그리고 우리나라에 처음 고스 문화를 알린 시트콤〈안녕, 프란체스카〉에 등장하는 패션을 떠올려보면 쉽게 상상 이 갈 것이다. 블랙을 기본으로 하고, 레이스와 베일 등으로 장식된 고 스 패션의 빼놓을 수 없는 특징은 백지장처럼 하얀 얼굴과 붉은 입술의 메이크업. 하지만 최근 들어 고스룩은 자신만의 돌연변이들을 만들어 내기 시작했다. 고스 문화가 현재 진행 중인 문화라는 것을 증명하듯이 뿌리를 같이한 채 각자의 개성이 드러나는 스타일로 변모한 서브 문화와 그 스타일들이 함께 주목을 받는 것. 그리고 그러한 경향은 지난 가을, 겨울 컬렉션이 열린 뉴욕, 런던, 파리의 런웨이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었다.

고스 문화가 시작된 런던의 후예들답게 런던의 디자이너들은 각자 자신만의 비전으로 고스 룩을 재해석했다. 자일스 디컨은 대표적인 고스 작가 에드가 앨런 포의 작품〈붉은 죽음의 가면〉속 이야기에서 힌트를 얻었다. “바깥 세상 사람들은 모두 죽어가고 있지만, 성 안에서 파티를 벌이는 사람들. 고딕 디스코 룩의 팜므 파탈”이 바로 그의 모티브. 일명‘고스 로봇’이라고 불러도 좋을 듯한 그의 룩은 고전에 바탕을 뒀지만 충분히 미래적이었다. 분명 고스 록 음악들로 가득한 블랙 아이팟 을 가지고 있을 것만 같은 디자이너 가레스 퓨는 고스와 공상 과학 영화가 만난 네오 고스풍의 전사들을 런웨이에 세웠다. 그의 잿빛 갑옷을 입고 최대의 고스 축제 ‘위트비 고딕 위크엔드(드라큘라 캐릭터를 탄생시킨 브램 스토커의 소설〈드라큘라〉의 배경으로 등장하는 영국의 시골 마을에서 일 년에 두 번 전 세계의 고스족들이 모여 여는 축제)’로 향하면 분명 모든 고스 동지들의 부러운 시선을 한몸에 받을 것이다. 파리의 고스족은 과거와 미래 사이의 시간 여행을 즐겼다. 독특한 헤어와 선글라스의 YSL과 광택 소재의 리틀 블랙 드레스의 발렌시아가 캣 워크에 선 모델들은 미래에서 날아온 고스 피에로 혹은 고스 댄서들을 연상시켰다. 반면에 레이스 장식의 블랙 블라우스에 골드 체인 목걸이를 잔뜩 걸고 나왔던 지방시의 모델들과 독특한 헤어피스에 블랙 풀 드 레스를 입고 천천히 캣워크를 걷던 알렉산더 맥퀸의 모델들은 각각 중세의 기사와 마법에 걸린 공주를 떠올리게 했다.

하지만 진짜 흥미로운 고스 룩을 선보인 디자이너는 따로 있었다. 일본의 애니메이션에서 영감을 얻었다는 로다테의 뮬레비 자매들이 선보인 룩들은 고스족과 롤리타족의 하이브리드 정도로 여겨지는 일본의 ‘고스롤리(Gothlolis)’의 모습을 그대로 닮아 있었다.“공포 영화와 일본 애니매이션 속 가부키 분장을 한 고스족들에게서 영감을 얻었죠. 특히 공포 영화들은 바로 그 시대를 잘 반영하고 있다는 점이 흥미로웠어요”라고 로다테의 케이트 뮬레비는 말했다. 그녀들의 핏빛 드레스들과 성근 피시넷스타킹들은 고스라고 해서 블랙에 목맬 필요가 없다는 것을 멋지게 증명한 셈. 또 다른 스타일도 존재한다. 앤드멀미스터는 일명‘고스 닌자(Goth Ninja)’룩을 따르는 이들에게 특히 인기다. 비록 그녀 자신은 결코 고스가 아니라며 부정하지만, 그녀 특유의 그림자처럼 늘어지는 블랙 실루엣에는 분명 어두운 로맨티시즘이 숨겨져 있다. 그 매력에 빠진 고스 닌자들은 그녀를 비롯해 릭 오웬스, 언더커버 등의 옷들에 열광하며 한여름에도 여러 겹의 블랙 레 이어링 스타일을 고집한다. 혹은 반대로 이러한 디자이너들이 거리의 고스 닌자들로부터 영감을 받고 있는지 모른다.“거리의 룩을 가져와 럭셔리하게 보이도록 하는 것이 바로 우리 패션계가 하는 일이죠.” 여러 쇼에서 고스 룩의 변형을 이용한 헤어를 창조한 헤어 스타일리스트 귀도 팔라우가 말했다.

고스 룩의 또 다른 변형을 꼽는다면 ‘이모(Emo)’룩을 빼놓을 수 없다. 여러 가지 정의가 있지만 주로 영어 단어 ‘emotive’혹은‘emotional’의 줄임말로 구슬피 울 듯이 슬픈 록 음악을 하는 밴드들의 스타일에서 기원했 다는 것이 정설. 미국〈보그〉의 컨트리뷰팅 에디터인 로버트 설리반은 이모와 고스는 분명 다르지만, 패션계는 주로 고스에서 파생된 이모 룩에 매력을 느낀다고 말했다. 그러한 룩을 위해 이모들은 주로 검게 물들인 헤어를 커튼처럼 얼굴 앞에 친 후, 여러 개의 피어싱, 그리고 진한 아이라이너(남성도 포함!) 등으로 마무리한다. 대표적인 밴드들은 Panic at the Disco와 My Chemical Romance 등. 그들과 그들의 룩이 21세기의 그런지가 될지는 두고 볼 일이다.

이처럼 다양한 스타일의 고스 룩을 한자리에서 만날 수 있는 기회도 생겼다. FIT 뮤지엄에서 열리는〈Gothic: Dark Glamour〉라는 전시회(9월 5일부터 내년 2월 21일까지)는 맥퀸부터 갈리아노, 릭 오웬스, 가레스 퓨, 앤드멀미스터, 올리비에 데스켄스, 리카르도 티시, 언더커 버 같은 디자이너들의 옷 75벌을 선보인다. 이 전시회와 더불어서 동 명의 책을 낸 FIT 뮤지엄의 디렉터이자 큐레이터인 발레리 스틸은 고스 룩을 이렇게 정의했다. “블랙의상이라고 모두 고스룩은 아닙니다. 그렇다고 모든 고스 패션이 블랙도 아니죠. 고스룩은 단순히 블랙이라는 컬러 그 이상입니다. 블랙이 지니고 있는 많은 분위기와 의미를 받아 들이는 미학이라 할 수 있죠. 죽음, 반항, 악마, 그리고 댄디즘까지.”이 전시회에 ‘고전적인 고스’‘사이버 고스’‘고스롤리’까지 여러 가지 라벨에 맞는 의상들이 준비되어 있는 건 물론. 이렇게 다양해진 고스 스타일이 기다리고 있는 지금, 고스 룩의 어두운 매력에 빠져보고 싶다면 이 보다 더 좋을 때는 없을 것이다. 그러니 이번 겨울 가장 자신과 잘 어울릴 만한 고스 스타일을 선택해 과감히 시도해보는 것은 어떤가!


- 에디터 / 손기호
- 포토 / BAE JUNG HEE, JAMES COCHRANE
- 출처 / www.vogu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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