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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션

악마는 스타일을 입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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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칙 릿 열풍을 주도하며 패션 에디터란 직업에 대한 환상을 에베레스트 산만큼이나 높여 주었던 그 영화의 제목은 절대 사실이 아니다. 첫째, 영화에선 주구장창 샤넬만 나오니까. 둘째, 진짜 악마는 프라다가 아닌, 자신만의 스타일을 챙겨 입고 패션쇼의 프런트 로에 앉아 있기 때문이다.
바로 이 밑의 그녀들처럼.
패션계에 절대 권력을 행사하는 파워우먼이자 영화의 실제 모델이기도 했던 미국 보그의 편집장 안나 윈투어. 그녀의 입김으로 세계 4대 컬렉션의 순서가 바뀌었고(기존의 런던-밀라노-파리-뉴욕 순에서 뉴욕-런던-밀라노-파리 순으로), 그녀의 박수 한 번에 디자이너의 명운이 결정되며, 아침 5시 기상 저녁 10시 취침이라는 원칙을 고수하기 위해 그 어떤 파티에도 10분 이상 머무르지 않는다는 안나 윈투어의 수많은 에피소드들은 이미 그녀의 존재와 함께 전설의 반열에 오르는 중이다.

바늘로 찔러도 피 한 방울 나오지 않을 것 같은 괴팍한 완벽녀 캐릭터는 영화 속에서 메릴 스트립의 카리스마로 충실히 재현되었지만, 개인적으로 아쉬움을 감출 수 없었던 부분이 있다. 그것은 바로 영화 속 그녀의 패션. 물론 머리부터 발끝까지 고가의 명품으로 휘감기는 하지만, 안나 윈투어는 브랜드 이전에 자신만의 확고한 스타일로 기억되는 사람이다.

클래식한 아이템과 페미닌한 요소가 조화롭게 어우러지는 아메리칸 럭셔리 룩과 한 올 흐트러짐 없는 뱅 헤어, 오버 사이즈의 블랙 썬글라스가 바로 그녀를 대표하는 스타일. 이 결코 더하지도 않고 덜하지도 않은 완벽한 착장이 바로 그녀의 상징이건만, 영화는 안드레아의 눈부신 변신에만 초점을 맞출 뿐 편집장의 아름다운 스타일에는 전혀 관심이 없는 듯했다. 물론 연기파 배우 메릴 스트립이 안나 윈투어 같은 늘씬한 몸매의 소유자가 아니라는 점이 크게 작용했을지도 모르지만 말이다.

최근 파리 보그에서는 모델 스네야나가 안나 윈투어를 그대로 패러디한 화보가 등장, 화제를 모으는 중이다. 트레이드 마크인 뱅 헤어와 블랙 썬글라스부터 샤넬의 트위트 재킷에 풀 스커트를 매치한 페미닌 룩, 그녀가 완소하는 아이템인 마놀로 블락닉의 슈즈, 한 손에는 스타벅스 다른 한 손에는 모토로라를 든 모습까지 안나 윈투어의 모든 것을 완벽하게 재현해 냈다는 평. 자신의 스타일을 집대성한 이 위트 넘치는 화보를 보고 안나 윈투어가 어떤 표정을 지었을지 궁금해지는 것은 나뿐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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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나 윈투어를 패러디한 파리 보그의 편집장이면서 톰 포드 시절 관능적이고 섹시한 구찌를 만들어 낸 뮤즈로 더욱 유명한 여자가 바로 카린 로이펠트다. 세계적인 에디터들이 늘상 그렇듯 오십 줄에 들어선 나이를 도저히 믿을 수 없게 만드는 슬림 바디와 죽여주는 각선미를 자랑하는 그녀는, 파리지앵을 대표하는 시크하고 자유로운 스타일이 특징. 손질하지 않은 흐트러진 헤어스타일을 고수하고 다리를 드러내는 미니 스커트를 애용하며 무조건 하이힐을 고집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카린 로이펠트 하면 떠오르는 약간 중성적인 얼굴과 퀭한 눈은 그녀의 시크한 룩을 더욱 강렬하게 만드는 역할을 한다. 헐리우드 스타들의 완벽하게 관리된 매끈한 얼굴에 익숙해진 사람들에게 쌩얼에 가까운 그녀의 얼굴은 살짝 충격적이기도 하지만, 카린 로이펠트는 보톡스마저 거부하는 지극히 파라지앵다운 애티튜드의 소유자이니 어쩔 수 없는 노릇. 하지만 과감한 디테일과 절제미가 적절히 믹스된 그녀의 근사한 스타일링을 지켜보다 보면 어느 순간 그 다크서클마저 시크의 결정체로 느껴지는 순간이 온다는 것이 패션계의 정설이다.

많은 디자이너들로부터 세계 최고의 스타일리스트라는 찬사를 받는 패션계의 대모 안나 피아지. 아마 해외 컬렉션에서 가장 눈에 띄는 패션 피플이 아닐까 싶다. 현대적인 의미의 빈티지에 르네상스나 고딕을 연상시키는 고전적인 연극미, 옵아트에 가까운 현란한 컬러 감각 등이 비빔밥처럼 함께 버무려져 있는 것이 바로 그녀의 스타일. 작고한 이사벨라 블로우와 함께 아티스틱한 모자를 애용하는 패션 피플로도 손꼽힌다.

너무나 많은 요소가 믹스된(심지어 그녀의 메이크업은 에스닉한 요소까지 가지고 있다) 안나 피아지의 스타일은 일견 유치하고 기괴해 보일 수도 있지만, 때로는 에디터 때로는 칼럼니스트로써 패션 매거진 역사와 함께 해 온 그녀의 카리스마는 그 어떤 경우에도 바래지 않고 빛나고 있다.

20년 넘게 사용하고 있는 올리베티 타자기에서 뽑아져 나올 그녀의 독창적인 크리틱과, 그에 못지 않게 독창적인 그녀의 멋진 패션을 다음 시즌 컬렉션에서도 기대해 본다.

자료제공 [ 온라인 패션 트렌드 매거진 더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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