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 콜레트에서 있었던 붐박스 파티에 나타난 아 기네스 딘. 트레이드마크인 탈색한 짧은 머리에 제레미 스콧의 현란한 프린 트 티셔츠를 입고, 손목엔 컬러풀한 팔찌가 가득했다. 또 다른 패션 이벤트엔 펑키한 조나단 선더스의 톱숍 원피스에 체크 재킷을 걸치고 등장했다. 이렇 게 70~80년대와 2008년을 오가는 스타일링을 즐기는 건 아기네스뿐만이 아 니다. 파리 마레 지구부터 서울의 홍대 앞까지 지금 젊은 세대들은 그 어떤 시대의 젊은이보다 더 과감한 컬러와 스타일링을 자유롭게 즐기고 있다. 매 직아이 같은 프린트 티셔츠, 닥터데님 등의 컬러풀한 스키니 팬츠, 그리고 80 년대의 핫 아이템이었던 하이탑을 신고 도시를 유랑하고 있다.
컬러에 대한 한계와 장벽은 여기저기에서 동시다발적으로 무너지고 있 다. LA 뮤지엄에서 무라카미와 함께 포토월에 선 마크 제이콥스는 스머프처 럼 파란 머리를 하고 나타났다. 네온 컬러를 과감하게 레이어드한 S/S 컬렉션 을 선보이기도 한 그는 그 파란 헤어를 거울로 비춰보며 아이처럼 즐거워했 을 것이다. 몇 달 후, 릴리 앨런은〈제5원소〉의 여주인공처럼 핫핑크로 헤어 컬러를 바꿨고, 영국적인 유머의 대명사 자일스의 핑크 드레스를 매치했다. 또 다른 컬러 충격은 뉴욕 모마에서도 일어났다. 전성기를 구가하고 있는 아 티스트 제프 쿤스의 네온 컬러 설치 작품에 뉴욕의 사교계부터 패션 디자이 너들까지 눈을 떼지 못했으니까. 팝콘처럼 톡톡 튀는 무라카미의 컬러 세계 는 또 어떤가. 핑크, 그린, 옐로 등의 유머러스한 컬러에 탄산음료 같은 재미 를 더한 무라카미의 작품 경매가는 나날이 치솟고 있다.
화산이 폭발하듯 터지는 현란한 컬러는 파리에서 시작해 세계 클럽을 메 우고 있는 테크토닉(Techtonik)과 자연스럽게 이어진다. 일렉트로니카, 디스코, 펑크, 뉴레이브가 섞인 듯한 새로운 음악에 맞춰 클러버들은 테크토닉을 즐기기 시작했다. 테크토닉은 2000년, 프랑스 파리의 클럽 메트로폴리스에 서 있었던‘테크토닉 킬러’라는 파티에서 유럽 각지의 클러버들이 함께 춤추 면서 시작되었다(말하자면 현란한 손짓이 특징인 춤을‘테크토닉’이라 부르 게 된 것!). 아프리카 전통 춤에서 모티브를 땄다는 현란한 손동작은 호루라 기를 든 교통 경찰의 손놀림을 연상시킬 정도. 특히 화려한 테크토닉 댄스를 보여주는 옐(Yelle)과 몬도테크(Mondotek)의 뮤직비디오가 엄청난 히트를 쳤다. 80년대 레트로 사운드의 무드가 느껴지는 최근의 일렉트로, 그리고 묘 한 전자음이 기분을 들뜨게 하는 유로 댄스까지 한꺼번에 플레이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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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에 민감하게 반응하고, 현대 예술의 흐름에 항상 안테나를 높게 세 우고 있는 마크 제이콥스 역시 이 21세기 컬러 혁명에 동참했다. 강렬한 원색 의 패브릭들은 그의 손을 거쳐 새로운 룩으로 완성되어 루이 비통 런웨이에 서 선보였고, 자신의 시그니처 컬렉션에선 원색의 액세서리를 어떻게 즐기 면 되는지를 보여줬다. 스트리트와 런웨이의 경계선을 두지 않는 런던 패션 위크는 더 적극적으로 프린트와 컬러를 활용한다. 헨리 홀랜드는 티셔츠를 가득 채우는 프린트로 주목 받았고, 기하학적인 패턴을 영리하게 사용한 데 이비드 데이비드는 미국〈보그〉의 런던 패션 이슈의 전면을 메웠다.“ 클럽의 에너지에 압도되곤 합니다. 저도 모르는 사이에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죠”라 고 말했던 갈리아노처럼 런던과 뉴욕, 파리의 젊은 디자이너들은 클럽과 아 틀리에, 그리고 갤러리를 오가며 새로운 컬렉션의 아이디어를 얻는다. 특히 런던 디자이너들을 통해 컬러 팔레트의 영역이 점점 더 확장되고, 클러버들 의 쇼핑 범위는 무한대로 확장되고 있다. 여기에 샤넬의 네온 그린 퀼팅 백이 나 손바닥만큼 큼지막한 더블 C 로고 목걸이, 펜디의 컬러 블록 벨트, 이브 생 로랑의 별 모티브 샌들을 신으며 패션의 절정을 맛볼 수 있는 것이다.
유튜브에서 테크토닉 동영상을 검색하던 인터넷 유저들은 당연한 수순 처럼‘테크토닉 패션’을 검색창에 입력하며 청각을 넘어 시각적으로 즐길 수 있는 방법을 찾아 나섰다. 그 결과 옥션의 상반기 히트 상품 1위에 박스 티셔 츠, 2위는 컬러 스키니 진, 그리고 6위는 80년대 스타일의 상징인 하이탑 슈 즈가 점령하게 되었다. 디올 옴므 하이탑부터 아디다스 빈티지 하이탑, 정욱 준의 리복 하이탑까지 거리에서 발견되고, 아메리칸 어패럴의 네온 티셔츠 가 꾸준히 팔려나가고 있다. 또 새로운 스타일을 위해 가로수길의 플로우, 청 담동의 데일리 프로젝트 등 강한 컨셉의 멀티숍을 찾기도 한다.
다프트펑크부터 옐까지 전자음이 귀를 간지럽히고 강한 비트가 심장을 두드리는 테크토닉을 즐기기 위해 클러버들은 과장한 메이크업도 망설이지 않는다. 케이트 모스처럼 스모키 아이에 펄 파우더로 메이크업을 마무리하 고, 펜슬로 작은 별을 얼굴 옆에 그리는 식이다. 자정은 넘었고, 얼른 외출하 고 싶을 때는 블라인드처럼 생긴 셔터 셰이드로 재미를 준다. 셔터 셰이드 역 시 80년대의 대표적 액세서리. 힙합 뮤지션 카니에 웨스트가 알 랭 미끌리가 특별히 제작한 셔터 셰이드를 쓰고 뮤직비디오에 나 오면서 장난감 같은 이 선글라스 는 홍대 앞, 압구정동 숍에서부 터 명동의 리어카에서도 판매되 고 있을 정도다.
매 시즌 패션 디자이너가 아 티스트와 함께 누구도 상상한 적 없었던 독창적인 스타일을 창조 하고 있는 이 시대. 음악, 미술, 패 션에서 동시에 일어나고 있는 80년대 레트로와 컬러 혁명은 톱니바퀴처럼 서로 맞물리며 새로운 21세기 문화 를 만들어가고 있다. 마치 라파엘로, 몬드리안, 드가처럼 음악에서 영감을 받 아 그림을 그린 화가의 작품이 또다시 음악가들에게 영향을 미쳤던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80년대 사운드와 스타일을 디지털 감각으로 변형하는 것에 모두가 열광하는 건 아니다. 80년대의 음악을 그 시대에 즐기던 DJ 진욱은 요 즘 유행하는 테크토닉 스타일에 별 감흥이 없다고 한다.“ 모든 것이 디지털화 되는 게 꼭 보기 좋은 건 아니죠. 세련되게 변형된 레트로보다는 진짜 레트로 를 더 좋아합니다.‘레벨 42’나‘데페시 모드’의 음악을 들으면 진짜가 무엇 인지 느낄 수 있죠.”
어쨌든 지금은 10년 전보다 훨씬 업그레이된 엄청난 테크놀로지가 세상 을 변화시키고 있다. 유럽에서 테크토닉이 인기를 끌기 시작하면 엠넷의 새 로운 광고에서 블루 홀터넥을 입은 효리가 테크토닉 디제이가 되고, 모마에 서 제프 쿤스의 작품들을 전시하면, 몇 시간 후에 아시아의 블로그에 그 사진 이 등장한다. 아기네스 딘이 조나단 선더스의 티셔츠를 런던에서 입으면, 한 국에서도 인기를 끄는 식이다. 고흐와 몬드리안의 컬러의 영향력이 아날로 그적이었다면, 무라카미와 마크 제이콥스가 몇 시간 만에 파장을 불러일으 키는 지금 이 시대는 테크토닉의 사운드와 함께 그 어느 때보다도 가장 디지 털적인 순간이다.
- 에디터 / 김은지 - 일러스트 / KIM SI HOON - 포토 / JAMES COCHRANE, GETTYIMAGES / MULTIBITS - 출처 / www.vogu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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