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봄, 21세기형으로 부활한 해피 히피 무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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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찌의 야한 새틴 셔츠를 배꼽 위까지 푼 뒤 팬츠를 아슬아슬하게 골반에 걸치고 나온 샬롬과 엠버. 6개월 뒤 이 듀오 슈퍼 모델은 가느다란 가죽 끈을 목에 두르거나 속살이 훤히 보이는 카프탄에 G 심벌의 지저스 샌들을 신고 반항적인 모습으로 같은 무대에 나왔다. 다들 불만에 찬 표정이었고 옷차림 역시 기존 패션의 고상한 질서에 말대꾸하는 듯했다. 톰 포드가 95년 겨울 컬렉션을 위해 70년대 디스코 룩을 선보인 뒤 그 다음 시즌을 위해 히피들을 캣워크에 내보낸 때였다. 30여 년 만에 히피 룩이 다시 세상의 빛을 보게 된 결정적 순간. 히피로 재미 좀 본 톰 포드가 99년 봄을 위해 좀더 장성한 히피들을 무대에 세운 것이다.
이 패션 메시아 덕분에 로라 애슐리풍의 커튼에나 쓰이던 싸구려 꽃무늬는 졸지에 최신식 그래픽 프린트가 됐고, 너덜너덜한 청바지엔 새털과 구슬 장식과 꽃무늬 자수가 놓여 값비싼 하이 패션으로 둔갑했다(참고로, 이 시대의 마지막 히피로 평가되는 안나 수이가 93년 발표했던 히피 드레스는 큰 반향을 일으키기엔 힘이 좀 달렸다. 올겨울 컬렉션에서 한 발 늦게 제대로 된 히피 룩을 표현했지만). 포드가 구찌 하우스를 위해 다락방에 처박혀 있던 히피 옷들을 꺼내기 전만 해도 히피 의상은 하이패션과는 전혀 거리가 멀었다.
환각적인 꽃무늬, 마리화나 향을 잠식하는 파출리 오일, 복슬복슬한 얼굴의 솜털, 시시껄렁한 자유주의…. <보그>가 왜 케케묵은 히피 얘기를 꺼내는지 궁금하신가. 작년 10월 초 한국의 조간신문들은 밀라노 컬렉션을 취재하고 돌아와 올봄 유행을 예측하며 ‘돌아온 히피 패션 유행예감’이란 식의 헤드라인을 뽑아 개제했다. 또 스타일닷컴 역시 올봄의 6가지 유행 속에 ‘히피 리바이벌’을 포함시켰다. 올봄에 히피 룩이 유행이라는 얘기다. <보그 코리아> 패션팀 역시 유럽에서 열리는 올봄 패션위크 취재 중에 21세기 히피들을 한 광주리 가득 채집하고 왔다. 60년대 말 이후, 그리고 포드의 90년대 중반 이후 한껏 모양낸 히피들이 올봄에 다시 윤곽을 드러내고 있는 것.
행복하다는 ‘happy’에서부터 심기증 상태를 표현하는 형용사 ‘hipped’는 물론 엉덩이 ‘hip’ 등등 히피의 어원에 대해 온갖 설들이 난무하고 있다. 그 중에 가장 설득력 있는 건 20세기 초 재즈 음악가들 사이에 쓰이기 시작해 50년대 중반부터 비트세대에 수용된 은어 ‘hep’에서 유래했다는 설. 히피 이전 시대의 뮤지션들이나 보헤미안들이 붙여준 좀 겸손한 느낌의 별명이란 설도 있다. 패션의 렌즈를 끼고 관측했을 때 이번 시즌 히피즘은 패션위크 타이밍상 뉴욕의 Y&Kei 듀오에 의해 비롯됐다고 볼 수도 있다. “저와 아내 윤한희가 결혼하자마자 유학을 위해 떠난 도시가 바로 히피의 발생지인 샌프란시스코였습니다.” 강진영이 이번 시즌 히피를 도입하게 된 동기가 육감에 의존한 거라 설명하기 시작한다. “샌프란시스코에서 자유로운 영혼의 아름다움, 보헤미안 무드, 히피 문화를 직접 체험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번에 그 시절의 아련한 추억에 본능적으로 끌긴 거죠. 이번엔 히피 무드를 동시대적으로 풀기 위해 모던하고 도회적인 ‘Urban Hippie’란 테마로 정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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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봄에 찾아온 히피즘은 뉴욕을 지나 샌프란시스코가 아닌 유럽에서 꽃을 피웠다. 어떤 트렌드든 사례를 열거할 때 최초로 언급되는 프라다는 히피 유행에 있어서도 0순위다. 판탈롱과 초커와 롱 백으로 조합한 프라다식 히피 룩은 오간자와 아르누보적 터치를 곁들여 이상야릇한 멋을 풍겼다. 패션쇼를 통해 60년대 말에서 70년대 초의 히피 시대를 발견한 스타일닷컴의 패션 저널리스트 사라 무어는 “소녀들이 히피-로맨틱 록 앨범 커버를 보고 자기 방의 벽에 낙서를 한 듯한 풍경”이라고 캣워크를 묘사했다.
D&G의 도미니코 돌체와 스테파노 가바나는 오씨 클락이 보면 울고 갈 만한 가지각색의 꽃무늬 옷들을 내놔 캣워크를 화원처럼 만들었다(‘Make Love, Not War’를 슬로건으로 한 원조 히피들은 꽃무늬 옷, 화관, 귀 옆에 꽂은 꽃 등으로 반전운동을 실천했었다). 고상한 조르지오 아르마니는 어떤가? 쇼 어느 순간이든 길쭉한 집시 프린지들을 볼 수 있었다(원조 히피들의 몸 위에선 인디언 프린지 장식이 찰랑거렸었다). 로베르토 카발리는? 70년대 스윙과 포크 룩에 하이 패션 감각을 가미했다(원조 히피들은 포크 뮤직에 심취하며 뜬금없이 민속 의상을 입어 고상한 사람들로부터 눈총을 받았었다). 에트로? 히피의 전유물이라 해도 좋을 페이즐리를 원 없이 사용했다(아라베스크 문양과 함께 페이즐리 역시 원조 히피들의 상징이었다). 푸치? 히피들이 깜빡 죽고 못살던 사이키델릭 프린트를 실컷 써봤다(원조 히피들은 현실 도피를 위해 약물을 썼고 그와 흡사한 사이키델릭 아트를 개발했었다).
보시다시피 이비자와 60년대 중반에서 70년대 초의 감수성을 계승한 밀라니즈들 덕분에 캣워크 여기저기서 파출리 향이 피어 올랐다. 그리고 자타가 공인하는 밀라노의 슈퍼 디자이너들이 이탈리아 어딘가에서 패션의 우드스탁 페스티벌을 열 무렵 대망의 파리 컬렉션이 시작됐다. 패션 종주국이 보유한 전통과 유행의 새로운 요새로 각광받는 발맹 패션쇼. 크리스토프 데카르넹이 인디언풍의 히피 룩으로 치장한 제니스 조플린을 닮은 슈퍼 모델들(다들 끝내주게 멋졌다!)을 무대에 내보낼 무렵 히피들이 올봄 거리를 휩쓸 거란 확신이 들었다. “미국 원주민과 인도의 믹스입니다. 또 자유에 관한 얘기죠.” ‘자유’나 ‘믹스’ 같은 히피식 용어를 통해 히피 유행을 표현한 것.
“레이브 파티나 클럽을 다녀온 걸들을 생각했습니다. 우드스탁 페스티벌과 히피들에게서 영감을 얻었고, 여기에 오뜨 꾸뛰르와 80년대 스커트를 믹스해 봤어요.” 니나 리치에서 동시대적인 히피들의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 올리비에 데스켄스도 히피 이미지를 아틀리에로 불러들였다고 설명했다. 파올로 멜림 앤더슨이 클로에를 통해 보여준 두 번째 쇼 역시 직접적이진 않지만 레트로 히피 분위기를 풍겼다. “패션에 민감한 히피 걸들의 사랑을 듬뿍 받았던 70년대 초 칼 라거펠트가 이끌던 그 옛날 클로에를 떠올렸다”고 사라 무어는 품평을 남겼다. 영화 <캐러비안의 해적-블랙펄의 저주>의 주인공들을 히피로 변신시킨 장 폴 고티에도 있다.
그런가 하면 현대판 히피들의 적절한 본보기가 된 사례도 있다. 클로에에서 동물 가죽을 거부했고, 구찌 그룹에서도 그런 정책을 밀고 나갈 거라 다짐한 스텔라 맥카트니. 히피들이 가슴에 새긴 ‘Peace & Love’를 향한 믿음과 그녀의 이데올로기는 상당히 맞아 떨어진다. 특히 현대 소비 자본주의의 계략과 반대되는 ‘자연친화적인 것’에 대한 관심은 60년대 히피들이나 2000년대 스텔라 맥카트니나 똑같다. 맥카트니의 시티 히피들은 탈색되거나 빛 바랜 듯한 꽃무늬를 즐겨 입는다. 또 소나 양의 피부를 벗겨 만든 동물성 구두 대신 나무를 깎아 만든 식물성 아로아 신발을 신고 패트릭 블랑이 만든 가든 월 앞에서 쉬거나 유기농 화장품을 바르는데 재미를 붙였다. 그런 면에서 올봄 스텔라 맥카트니의 아가씨들은 현대판 히피의 전형! 톰 포드 시대 이후 올봄에 와서야 제대로 대접 받지만, 사실 히피들의 전성기인 60년대 말에서 70년대 초만 해도 히피들의 옷차림은 꾸레주나 가르뎅이 판을 치던 퓨처리즘 세력에 밀려 패션계로부터 경멸 당했다. 또 무시무시한 펑크족들에게 두들겨 맞는 등 당대에 히피 패션은 꽤 심한 압박을 받아왔다. 특히 그들이 추종했던 반사회적 태도와 ‘안티’ 패션은 주류 세력들로부터 독기 어린 시선을 받기에 충분했다. 머리를 길게 풀어헤친 뒤 산발하며 지내거나 바닥에 질질 끌리는 꽃무늬 치마에 나팔 바지로 모양을 내거나 혹은 집단 생활하며 전라로 지내는 아가씨들이 기성 세대들에게 곱게 보일 리 없다. 하지만 비슷한 시기에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대두된 모즈나 스페이스나 펑크 룩 등과 비교할 때 히피 패션만이 지닌 매력은 탁월하다. 강진영과 윤한희는 “드레스업과 드레스다운, 하이엔드와 로우엔드, 남성적인 것과 여성적인 것 등 대조되고 상반되는 것들의 파격적이고 자유로운 조화”를 주장한다. 그런 관점에서 히피의 사촌인 ‘Boho’ 트렌드의 스타인 메리 케이트 올슨이나 시에나 밀러를 제치고 슈퍼 모델 카렌 엘슨이 Y&Kei 커플의 눈에 든 히피 패셔니스타다. “시적이며 고요한 아름다움”이라며 그는 카렌식 히피 스타일을 정의한다. “거기에 어우러진 유니크하고 낯선 그녀의 외모, 형식에 얽매이지 않는 분방하고 진보적인 스타일에 대한 애티튜드와 보헤미안 정신!”
이제 프라다든 데스켄스든 맥카트니든 강진영이든 간에 왜 슈퍼 디자이너들이 히피들과 환각의 패션 파티를 벌이게 됐는지 조사해볼 차례다. 강진영은 히피들의 옷을 통해 요즘 패션이 위로 받고 싶었을 거라 주장한다. “신속하게 변하는 세상, 점점 하이 테크놀로지화, 디지털화되는 현재에 대한 반작용 아닐까요? 사실 몇 시즌부터 계속 퓨처리즘이나 메탈릭이 패션의 큰 주제이자 메가 트렌드였잖아요. 어쩌면 저뿐 아니라 많은 디자이너들이 자연으로 복귀하고 싶고 좀더 아날로그 터치가 가미되고 손맛이 느껴지는 옷을 그리워한 것 같습니다.” 하긴 1년 전 패션 진화론자들은 차가운 미래주의나 미니멀리즘이 슬그머니 고개를 들 무렵 그것과는 상반된 이미지가 조만간 올 거라 예측했었다. 그건 보시다시피 이렇게 히피로 나타났다. 21세기 히피 트렌드와 관련해 재미있는 사실 하나! 바로 시에나 밀러가 깊숙이 개입됐다는 것. 사실 이 슈퍼 패셔니스타는 대형 트렌드가 출현할 때마다 영화와 패션을 공평하고 영리하게 잘 이용하고 있다. 60년대 스페이스 룩이 유행하던 2006년 봄, 그녀는 영화 <팩토리 걸>에서 당대의 패션 아이콘 에디 세즈윅으로 출연해 트렌드세터로 대접받지 않았나. 그리고 이번 시즌엔 <히피 히피 셰이크>에서 60년대의 논쟁적인 매거진에 다니는 히피로 나온다. 커스텀 디자이너 Verity Hawkes에 의해 재현된 히피 룩 역시 디자이너들과 스타일리스트은 물론 길거리의 멋쟁이들에게 영감을 줄 게 뻔하다.
맥카트니처럼 에콜로지나 사랑에 목숨을 걸지 않더라도 히피 패션의 부활에 대해 반가움을 표하는 패션 애호가들은 꽤 많을 것이다. 물론 저쪽에선 “절대 판탈롱이나 부츠컷은 입지 않을 거예요”라는 원성이 들리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곧 멋쟁이들은 카발리의 데이지 프린트로 몸을 감싸고 스키니를 벗어 던진 채 프라다의 나팔 바지를 찾아 나설 것이다. 패션을 통쾌하게 즐기는 건 한물간 유행에 대해 반기를 드는 거니까. 현재 난리법석인 유행에 대한 반항적인 태도. ‘안티’ 패션이야말로 히피즘의 키워드가 아닌가.
- 에디터 / 신광호 - 포토 / JAMES COCHRANE, BAE JUNG HEE - 출처 / www.vogue.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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