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패션

뉴 팬츠의 시대가 열렸다

반응형
뉴 팬츠의 시대가 열렸다



몇몇 패션 천재들 덕분에 새로운 팬츠의 시대가 열렸다. 지난 3월 가을, 겨울 파리 컬렉션의 둘째 날 이른 아침, 발렌시아가의 니콜라스 게스키에르가 모델에게 타이니한 피크 숄더 프레피 재킷에 좁은 조퍼스(Jodhpurs)를 입히고 알록달록한 테크노 샌들을 신긴 뒤 캣워크에 내보냈을 때, 사람들은 팬츠에 대해 얘기하기 시작했다. 승마 바지처럼 밑위 길이가 길고 힙 부분은 넉넉한데, 무릎 위부터 발목까지는 조여진다는 점에서 조퍼스라고 할 수 있지만 많은 사람들이 그 바지를 두고 ‘조퍼-쉬’하다고 말하는 것은 니콜라스 게스키에르의 수술 칼처럼 날카로운 테일러링이 첨가되었기 때문이다. 옆선의 파이핑과 무릎의 절개, 허벅지 바깥쪽과 안쪽의 기하학적인 테일러링, 포켓 라인과 절묘하게 만나는 턱… 이 하이테크 조퍼스는 케이트 모스를 위시한 많은 여성들을 발렌시아가에 열광하게 한 ‘울트라 쿨 애티튜드’의 새로운 형태였다. 니콜라스 게스키에르는 여성들에게 쿨한 힙과 다리를 선사하는 성형 팬츠의 대가임이 분명하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또 다른 천재는 전혀 다른 시대를 끌어낸 스테파노 필라티. 그는 생 로랑 아카이브로부터 영향을 받는 것을 전면 부정하지만 그의 올 가을, 겨울 컬렉션을 보는 사람들은 무슈 생 로랑의 르 스모킹을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특히 서른 아홉 번째에서야 등장한 밑단이 조여지는 배기 팬츠와 긴 더블 브레스티드 재킷 수트는 디자이너가 말한 ‘단순하면서 볼륨감 있는 실루엣’이 수트에서 어떻게 표현될 수 있는지 설명한다. 힙 부분은 남자 바지를 입은 것처럼 크지만 밑단은 발목에서 스마트하게 조여지며 잘린 이 크롭티드 배기 팬츠는 여성들에게 수트 팬츠의 새로운 실루엣에 대한 영감을 불러일으킨다는 점에서 빼어난 ‘뉴’라고 할 수 있다. 60년대 생 로랑의 르 스모킹에 더해진 이 말할 수 없이 매력적인 ‘벙벙함(벙벙함은 스테파노 필라티의 시그니처라고 할 수 있을 듯)’은 힙과 허벅지의 형태에 관한 핸디캡을 보완해주는 아주 친절한 형태이기 때문이다. 폴 스미스는 이런 배기 팬츠의 형태를 마치 역삼각형처럼 강조했고, 프라다와 미우미우 컬렉션에서는 40∼50년대 남자 친구, 그러니까 지금 보자면 할아버지 것 같은 클래식한 배기 팬츠가 등장했다.

뉴 팬츠의 시대에 도나텔라 베르사체가 합류했다는 것이 놀라울 수도 있겠지만 사실이다. 요즘 그녀는 메두사 금장 버클을 포기한 대신 밀라노의 미니멀리즘 여왕이 되고 있으니까. 어느 때보다 단순한 형태를 강조했던 이번 가을, 겨울 컬렉션에서 그녀는 파워풀한 하이 웨이스트 팬츠를 선보였다. 디젤의 하이 웨이스트 진처럼 여성의 풍만한 보디라인을 강조하는 대신, 허벅지부터 타이트하게 조여져 발끝까지 일자로 떨어지는 하이 웨이스트 팬츠들은 섹시하기보다 지적이고 강력해 보인다.

하이 웨이스트는 팬츠의 가장 눈에 띄는 변화다. 미우치아 프라다가 스웨터 위에 벨트를 두른 후, 원피스든 티셔츠 위든 어디에나 벨트를 두르는 것이 근사한 스타일링이고 새로운 프로포션을 위한 액션이 되었을 때 이미 허리선은 로 라이즈 시대를 벗어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드디어 팬츠의 허리선이 높아진 것. 하이 웨이스트 팬츠는 몇 가지 서로 다른 스타일을 보여주고 있다. 이미 올해 초 스텔라 맥카트니가 테스트를 마친 하이 웨이스트 테일러 팬츠(밑단이 조여진다)는 프렌치 시크를 기초로 한 스타일. 지방시의 하이 웨이스트 세일러 팬츠나 셀린의 트위드 하이 웨이스트 팬츠(와이드 오비 벨트로 높은 허리선을 강조한)도 모두 비슷한 맥락이다. 반면 디젤이나 돌체 앤 가바나, 디스퀘어드 2 같은 브랜드에서 보여지는 캐주얼한 하이 웨이스트 진과 쇼츠는 80년대부터 90년대 초반까지의 하이 웨이스트 진에 대한 추억, 또는 그보다 더 멀리 간 50년대 핀업 걸에 대한 노스탤지어를 담고 있다.



그렇다면 스키니 팬츠는 완전히 자취를 감추는 것일까? 로 라이즈 스키니 진은 이제 진부한 팬츠가 되겠지만 팬츠의 기본 실루엣은 스키니를 따르고 있다. 차이가 있다면 몸과 팬츠 사이에 어떤 미세한 공간을 남겨 둔다는 것. 그리고 이건 새로운 팬츠들의 아주 중요한 특징이다. 올리비에 데스켄스가 니나 리치 컬렉션에서 선보인 슬라우치 스키니 진이 대표적인 예. 분명 보디라인을 따라 스키니하게 떨어지지만 밑위 길이가 길고 허벅지도 타이트하게 조이지 않으며, 발목까지 자연스러운 주름이 잡히게 되어 있다. 고요한 미니멀을 재단하는 질 샌더의 라프 시몬즈는 발목에서 주름이 잡히는 테일러드 스키니 팬츠를 선보였는데, 몸에 착 달라붙는 대신 아주 섬세한 공간을 남겨 고요한 분위기를 고조시켰다. “뭔가 좁은 것을 원했어요!”라고 말한 마크 제이콥스는 역시 길고 좁은 하이 웨이스트 팬츠를 선보였다. 우리는 작년 겨울부터 라이딩 부츠가 어느 때나 편리하게 신을 수 있고 또 스타일리시해 보인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올 가을, 겨울에는 그에 걸맞는 짝이 등장한다. 바로 니커즈. 40년대 2차 대전 룩에서 영감을 얻은 구찌 컬렉션에서는 밑단이 단추로 조여지는 트위드 니커즈가 안감이 누빔으로 된 트위드 보머 재킷과 함께 매치되었다. 하지만 더 매력적인 것은 앤 드멀미스터의 울 저지 니커즈들. 블랙 또는 화이트 컬러의 니커즈는 언뜻 펠트처럼 보이는 거친 텍스처를 갖고 있지만 가볍고 부드러운 울 소재이고, 바이어스 재단되어 다리 실루엣을 슬림하게 살려준다. 여기에 검은 플랫 라이딩 부츠를 신고 검은 부클레 조끼를 입는 것은 말할 수 없이 자유롭고 세련돼 보인다.

로 라이즈 대신 하이 웨이스트가 등장했듯, 벨보텀 플레어 대신 밑단이 조여지는 것이 새로워 보이는 것도 뉴 팬츠의 특징이다. 지난 봄, 여름 컬렉션에서 스포티한 니커즈로 히트한 드리스 반 노튼은 클래식한 매니시 배기 팬츠 밑단에 스포티한 고무 밴드와 지퍼를 믹스 매치해 발목에서 끝나게 했다. 발목에서 조여지는 실루엣은 레깅스에 응용되기도 하는데, 디자이너 김재현은 올 가을, 겨울 컬렉션으로 밑단이 조여지는 니트 레깅스 팬츠(딱 달라붙지 않고 루즈한 실루엣)를 디자인했다.

우리는 새로운 시대의 팬츠들에서 어떤 공통점을 발견할 수 있다. 바로 차세대 전투기를 만드는 것 같은 하이테크! 스마트한 디자이너와 노련한 재단사들은 더 이상 팬츠를 여성의 몸에 의지하며 만들지 않는다. 다리가 짧든, 허벅지가 굵든, 힙이 크든, 다리 근육에 탄력이 있든 없든 팬츠는 개의치 않게 된 것이다. 디자이너들은 소재의 테크닉(프라다와 미우미우, 앤 드멀미스터의 경우)과 테일러링의 테크닉(발렌시아가, 이브 생 로랑, 니나 리치, 질 샌더)을 발휘해 여성의 몸에서 몇 밀리, 또는 몇 센티미터 간격을 두고 떨어져 있는 독립적이면서도 유기적인 구조물을 만들고 있다. 그리고 그건 팬츠를 입은 여성들을 더 아름다워 보이게 한다. 그런 의미에서 그 이전과 구분되는 차세대 팬츠라 할 만하다.

- 에디터 / 황진선
- 모델 / 이현이, 박희현
- 헤어 / 김선희(고원)
- 메이크업 / 박혜령(고원)
- 출처 / www.vogue.com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