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 사람들은 옛날부터 고정불변하는 아름다움의 어떤 유일한 전형을 꿈꿔왔다. 그 결과 수학이 조형원리로 번안된 ‘황금비례’와 같은 것들이 궁극의 아름다움으로 행세하게 되었다. 이것이 인체에 적용되면 ‘밀로의 비너 스’ 상과 같은 완벽한 비례를 가진 조각상이 만들어지게 되었고, 건축에 반영되면 ‘르네상스 양식’과 같은 완벽 한 비례의 건물이 만들어지게 되었다.
절대적인 아름다움에 대한 꿈은 서양의 역사 속을 도도히 흐르고 있는 거대한 흐름이 되어 지금까지도 막대한 영향력을 미치고 있다. 하지만 땅에 뿌리를 박고 사는 우리들이 느낄 수 있는 아름다움이란 몇 가지로 추릴 수 있을 정도로 획일적이지 않다. 새벽에 뜨는 해도 아름답고, 저녁에 지는 해도 아름답다. 온 천지를 봄 향기로 가득 채우는 새싹들도 예쁘고, 온 천지를 붉은 색으로 가득 물들이는 단풍의 향연도 아름답기가 그지 없다.
변한다고 해서 이것들을 아름다움의 목록에서 제외시킨다면 도대체 아름다움이란 무언인가? 변하지 않는다고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것이야 말로 넌센스일 수가 있다. ‘밀로의 비너스’가 아름답기는 하나 그 녀의 몸매를 닮고 싶은 여성이 얼마나 될까? 아무리 절대적인 아름다움을 상징한다고 하더라도 지금의 시각으 로는 뚱땡이(?)다.
아름다움이 다양하다는 것은 현대 패션 디자인을 보면 극명하게 느낄 수가 있다.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세계의유수한 디자이너들이 만들어내는 옷의 모양들은 하나 같이 다르면서도 하나 같이 아름답다. 아름답다라는 동일한 틀 안에서도 어떤 것은 우아하고 어떤 것은 귀엽고 어떤 것은 특이한, 각각의 개성 있는 아름다움을 선보이고 있다.
같은 음식이라고 각각 다른 맛이 있기 때문에 식도락의 즐거움을 얻을 수 있는 것처럼 같은 옷이라도 각각이 다른 아름다움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보는 즐거움, 입는 즐거움이 있는 것이다. 이것은 분명 획일적인 아름다움이 줄 수 없는 즐거움이다. 그런데 디자인을 만드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자신이 만든 아름다움이 비누방울처럼 순식간에 사라지기 보다는 될 수 있으면 오랫동안 생명을 가지기를 바라는 것이 인지 상정이다.
동대문 시장과 같이 순환하는 시간의 속도에 승부를 거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이름에 승부를 거는 디자이너들 이라면 당연히 시간에 부식되지 않는 개성을 추구하게 된다. 과도한 획일성으로 치우치지 않는다면 이러한 움 직임은 대개 우아하고 기품이 있으며, 한 눈에 파악되지 않는 신비로운 조형적 개성을 구축하는 방향으로 나아 가게 된다. 눈에 튀고, 쉽게 이해되는 디자인은 생명력이 빤하기 때문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