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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션

다이애나를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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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7년 여름, 교실로 뛰어들어온 친구의 화제거리에 다들 시선이 집중됐다.
“다이애나 왕세자비가 죽었대!”

파리에서 파파라치에게 쫓기다가 교통사고로 죽었다며 그의 죽음을 애도하던 친구가 난 이해 되지 않았다. 왕세자비라는 지위, 화려한 옷과 파티들, 자선 사업 등 여성이라면 한 번쯤 꿈꾸는 멋진 삶-당시 중학생이었던 나는 다이애나 비에게 어떤 것들이 커다란 짐이었는지 전혀 인지하지조차 못했다-을 살다간 다이애나를 동정할 수 없었다. 짧고 굵게 살다간 그녀의 인생을 동경했으면 했지.

그렇게 다이애나는 단지 8, 90년대 가장 추앙 받던 아이콘이었지만 죽음과 함께 잊혀졌다. 그녀의 이름이 다시 인터넷에 오르내리게 된 것은 올해가 그녀 사망 10주기 되는 해이기 때문이다. 그녀의 두 아들이 돌아가신 어머니의 생일에 맞춰 선물로 콘서트를 개최하였고 그녀 생전 친구였던 앨튼 존, 듀란 듀란 등이 참석했으며, 콘서트의 모든 수익금이 생전 그녀가 지원했던 자선 단체에 기부 된다는 기사를 보고도 나는 여전히 시큰둥 했다.

다이애나에 대한 왠지 모를 거부감, 무관심하지만 한편으론 기사 스크랩 모드로 일관했던 난, 하지만 어느 블로거의 글을 보고 그녀에 대한 냉담함이 순식간 녹아버렸다. 그녀가 바란 건 오직 진정한 사랑, 그마저도 결국 못 찾고 죽어버린 가련한 한 여성이었을 뿐이었다.
 
스펜서 가의 셋째 딸로 태어난 다이애나. 가족환경은 그녀의 내면을 형성하는 데 큰 영향을 끼쳤다. 그녀는 어려서부터 자신이 아들이 아니어서 부모에게 실망을 줬다는 죄책감에 시달렸고, 이혼한 부모님으로부터의 애정 결핍, 새어머니와의 뿌리 깊은 갈등, 숭배의 대상으로 여긴 완벽한 큰 언니 등 다이애나에게는 그 환경이 버겁기만 했다. 모든 면에서 뛰어났던 언니들과 피아니스트였던 외할머니 등 가족 사이에서는 무엇을 해도 주목 받기 힘들었던 그녀였다.

이런 와중에 사려 깊고 남을 배려할 줄 알며 선천적으로 동물을 좋아하고 잘 돌볼 줄 알았던 다이애나는 학교 근처의 병원으로 자원봉사를 다니게 되었고 이 일을 계기로 학교에서 상을 받게 되었다. 이 경험은 항상 가족들과 비교 되어왔던 그녀에게 자신감을 주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이혼한 부모님 집을 오가며 한 편으론 지극히 귀족적인 삶을, 한 편에선 아주 평범한 삶을 살 수 있었기에 나중에 자식들의 교육 또한 너무 왕실의 틀에 맞추지 않고 지극히 평범한 학창시절을 보낼 수 있게 하는 그녀의 교육법을 만들어 낼 수 있었다. 반면 이혼한 부모님은 과도한 선물 공세를 펼 뿐 그녀가 진정 원했던 따듯한 포옹 한 번 제대로 해
주지 않아 그녀는 아이들을 키우면서 자신의 품을 마음껏 느낄 수 있게 해주었다.

다이애나는 공부엔 흥미가 없었지만 발레와 수영에 소질을 보였고, 한 때 발레리나를 꿈꾸기도 했으나 발레를 하기엔 너무 큰 키-175cm-로 꿈을 접어야 했다. 활발하고 친구들과 장난치기 좋아하던 평범한 소녀였다.
 

처음에 찰스 왕세자는 다이애나의 큰 언니인 사라와 사귀었으나 그녀의 오만한 성격 때문에 깨지게 되었고 대신 사랑스럽고 수줍음 많은 이 소녀에게 마음을 빼앗긴다. 찰스는 사랑이 어떤 형태든 간에 그녀를 사랑한다고 했고 그녀가 왕세자비가 되어주길 바랬다. 결과적으로는 비극의 시작이었다.

서른 살의 부족함 없는 왕자와 열여덟의 아직 소녀 티를 못 벗은 다이애나. 그리고 찰스의 오랜 친구이자 지금의 부인이 된 카밀라. 다이애나의 표현을 빌리자면 신랑, 신부를 합해 셋인 결혼식을 올린 것이다. 이미 결혼 전부터 그녀는 찰스와 카밀라의 관계를 알고 있었고 운명적인 만남을 그리며 제대로 된 연애 한번 해 보지 못한 여린 다이애나는 그 질투심을 어떻게 다뤄야 하는지도 몰랐다. 질투뿐만 아니라 너무나 달라져버린 생활과 언론의 관심 또한 그녀가 극복해야 할 대상이었다.

그녀는 매일매일 울었고 대식증 때문에 끊임없이 먹고 토했으나 찰스는 무신경했다. 찰스의 무관심은 카밀라 때문이기도 했지만 대중에게 너무 사랑받는 다이애나에 대한 질투심도 한 몫 했다. 받들어져 자란 왕세자의 당연한 반응이랄 수 도 있다. 현실의 왕자님은 그런 것이다. 그것은 끊을래야 끊을 수 없는 악조건의 연속이었다. 대중 앞에서만 서면 환호를 받지만 집에만 오면 아무도 잘했다며 맞아 주지 않았다.

왕실에서는 그것이 그냥 당연히 그래야 하는 것으로 생각했던 것이다. 칭찬과 애정에 목말라 끊임없이 자기 자신과 그녀가 처한 상황에 맞서 싸우던 그녀는 자원 봉사로 안정을 찾아갔다. 그것이 그녀의 본성을 억누르지 않고 자연스럽게 할 수 있는 것이자 모두가 좋아하는 것이었다.

 

그 뒤는 모두가 아는 대로 이혼, 자원 봉사 활동, 말 많은 남성 편력, 비운의 교통사고로 36년 그녀의 짧고 굵은 생이 막을 내린다. 스타가 될 수 있는 최고의 조건들을 부여 받았지만 소화할 수 없었던 그녀는 그렇게 이 시대의 또 다른 전설이 되어 버린 채 가버렸다.

 

드라마 '궁' 마냥 우리나라에도 여전히 왕실이 존재한다면 수 많은 장인, 대대로 내려오는 우리 전통 기술로 패션에 더 많은 공헌을 하지 않았을까. 왕세자비를 위한 디자이너들, 최고의 옷감, 오뜨 꾸뛰르 드레스, 수트, 백, 구두. 하루에 네 번 옷을 갈아입어야 하는 신분으로서 그녀가 패션 산업에 끼친 영향은 지대했다.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물이 흐르듯 모든 문화 현상도 위에서 아래로 흐른다. 물론 패션도 그러하다. 그녀는 시대를 앞서간 패셔니스타였다. 그녀의 옷을 분석하면 지금의 잇 브랜드를 예상할 수 있다. 물론 옷은 우리나라에는 잘 알려지지 않은 내셔널 디자이너들이 담당했다. 그것을 왕실이 있는 영국과 국내 사정을 비교하긴 그렇지만 우리나라의 정,재계 인사들이 너무 비싸거나 대중에게 알려진 브랜드의 옷을 피하는 것과 같다. 그러나 그녀가 즐겼던 백과 구두인 샤넬과 디올, 페라가모, 지미 추 등이 지금의 우리나라에서 주가 높은 명품 브랜드임을 보면 언젠가 우리나라 디자이너들의 입지도 크게 넓어 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잠깐 스친다.

왕실 입궁 초기 다이애나는 촌스러운 스타일로 악평에 시달렸다. 그녀의 장점은 경험하면서 배우는 것이었는데 그녀는 그녀만의 스타일을 찾기 위해 수많은 영국 디자이너들을 경험했다. 때때로 그녀는 다른 왕실 가족들이 찾지 않는 신선한 디자이너들의 옷을 시도했다.

빌 패슐리는 세인트 마틴 졸업생으로 다이애나의 두 언니 사라와 제인의 웨딩드레스를 담당하기도 했다. 같은 학교 졸업생들인 브루스 올드필드나 리파 오즈백 등도 그녀가 찾았던 디자이너들이었다.

 

80년대에 종종 다이애나의 데이웨어를 디자인했던 재스퍼 콘란은 현재 플래그십 스토어와 향수, 그릇 등으로 크게 사업을 확장했다. 빅터 애들스타인은 그가 만든 드레스를 다이애나가 백악관에서 입을 줄 몰랐다. 그 드레스를 입고 다이애나는 존 트라볼타와 춤을 추는 명장면을 연출했었다.

 
그러나 캐서린 워커보다 다이애나를 잘 이해하는 디자이너는 없었다. 그녀는 다이애나를 위해 수많은 의상을 만들었다. 다이애나가 92년 방한했을 때 입은 옷도 그녀가 디자인한 옷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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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왕실하면 빠질 수 없는 것이 모자다. 그녀는 영국뿐 아니라 스코트랜드, 뉴질랜드인의 밀리너(여성 모자상인)에게 모자를 맞춰 썼다.

그녀 살아생전 당시엔 다이애나 왕세자비만으로 수십 종의 책과 타블로이드지, 연예 산업, 파파라치, 의상 디자이너, 모자 디자이너, 오뜨 꾸뛰르등이 먹고 살 수 있었다. 한 명의 스타 아이콘이 생산하는 경제 규모 운운하는 것이 어쩐지 몸에 와 닿는 요즘 아닌가.
상상해본다. 그녀는 단지 사랑 받고 싶었을 여인이었을 뿐인데.

[참고자료]
DREESING DIANA / TIM GRAHAM AND TAMSIN BLANCHARD
나, 다이애나이 진실/ 앤드류 모튼 / 손은경, 이순희 옮김
PRINCESS DIANA AND PRINCE CHARLES FASHION PAPER DOLLS IN FULL COLOR / TIM TIERNE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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