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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션

완벽한 장르적 정체성, 그러나 2% 모자란 패션센스 - <개와 늑대의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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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벽한 장르적 정체성, 그러나 2% 모자란 패션센스 - <개와 늑대의 시간>
<개와 늑대의 시간>은 마치 가속도가 붙으며 날아가는 공 같은 느낌이다. 주연들의 연기가 아직 설익게 느껴졌던 초반부를 지나 드라마의 첫 회에 등장했던 내용들이 7회에 맥락을 갖춘 상태로 재등장하는 부분에서 터닝 포인트를 찍고, 치밀한 시나리오가 빛을 발하는 후반부에 들어서면서부터는 가히 점입가경이라 할 정도다. 서서히 피치를 올리며 시청자들을 패닉 상태로 몰아넣고 있는 이 드라마는 이제 모든 갈등이 최고조에 이르러 절정의 피날레만을 남겨두고 있는 상태.

부모의 원수 갚기, 원수의 딸과 사랑에 빠진 로미오와 줄리엣형 로맨스, 두 형제와 한 여자의 삼각관계, 언더 커버(위장 잠입), 기억상실증 등 개와 늑대의 시간이 뿌리를 내리고 있는 지점에는 뻔하디 뻔한 클리셰들이 뭉뚱그려져 있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특유의 짜임새 있는 극본은 이 모든 진부한 설정들을 느와르라는 드라마의 정체성 앞에 일목요연하게 정렬시키는 데 성공하고 있다.

이제껏 한국 드라마에서 보기 힘들었던 이 느와르라는 장르는 전통적으로 패션과 상당히 친밀한 관계를 가진다. 멀게는 영웅본색의 주윤발이 성냥개비를 물고 쌍권총을 휘갈길 때 근사하게 펄럭였던 롱 코트부터, 가깝게는 무간도와 달콤한 인생에서 류덕화와 이병헌이 보여 준 완벽하게 각 잡힌 수트들은 풀 샷과 클로즈업이 극단적으로 교차되는 느와르 특유의 미장센과 더불어 운명에 휘둘리는 사내들의 비장미를 고조시키는 데 한 몫을 해냈다. 그렇다면 한국형 느와르 드라마의 탄생을 알린 개와 늑대의 시간의 주인공들은 과연 어떤 패션을 선보이고 있을까.

초반부에 수현(이준기)이 몇 번 러프한 캐주얼 룩을 입고 등장하긴 하지만 남성성에 충실한 느와르답게 이 드라마의 남자 출연진들은 수트를 고집한다. 그야말로 오로지 수트의 시간인 것.

대한민국 드라마 역사상 가장 불운한 주인공으로 남을 이수현은 국정원의 신입요원으로 등장하는 초반, 강민기(정경호)와 함께 딱 사회 초년생다운 수트 룩을 선보인다. 특히 2회에서는 슬림한 실루엣의 그레이 수트를 나란히 입고 등장했는데, 둘 다 깔끔한 화이트 셔츠와 블랙 셔츠, 가는 블랙 타이를 매치해 국정원의 엘리트다운 샤프한 자태를 드러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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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후에 수현이 청방이라는 조직으로 잠입한 뒤 사고로 기억을 잃고 마오의 수족인 케이가 된 후부터, 이준기의 수트 룩은 사뭇 다른 양상을 보이기 시작한다. 귀 한 쪽에 걸린 이어링부터 시작해 턱 디테일, 스티치, 카라와 소매에 스트라이프 무늬가 들어간 가벼운 분위기의 셔츠류가 등장하기 시작하는데, 문제는 그들의 조합이 그다지 매끄럽지 않다는 데 있다. 특히 지우(남상미)가 마오의 집으로 코끼리상을 확인하러 갔던 씬에서 입었던 초록색의 패턴 셔츠는 너무 양아치 아저씨 삘이라, 순간 화들짝 놀랐을 정도.

모든 기억을 잃은 수현이 케이가 된 후 어울렸던 사람들은 온통 청방의 깡패들뿐이라 그의 후진(?) 패션은 당연한 것이라 위로하려 해도, 지라프부터 문이사, 심지어 배상무까지 다들 나름대로 스타일리시한 수트 감각을 선보이고 있는 걸 생각하면 아쉬움을 감출 수 없다. (모델 출신인 지라프는 그렇다 쳐도 조직생활로 잔뼈가 굳은 문이사마저 그 어렵다는 화이트 수트를 소화해 낸다.)

그래도 이전의 지루한 모범생 수현과 180도 다른 껄렁하고 천연덕스러운 케이의 매력에 홀딱 빠져버린 바, 이준기의 스타일리스트에게 바라는 것은 오직 한 가지 뿐이다. 양아치 스타일이어도 좋으니 제발 그 하이 스탠 카라 셔츠만 입히지 말아 주세요- 하는 것. <왕의 남자>로 유명세를 탄 이후 내내 이준기를 워스트 드레서의 늪으로 빠지게 했던 이유 중 하나가 바로 그 높은 셔츠 깃이다. 네크에 단추가 두 세개씩 달린 셔츠들은 주먹만한 얼굴의 비비안 웨스트우드 쇼의 모델들에게나 어울리는 물건이지, 평범한 사이즈의 얼굴을 가진 이준기에게는 피해야 할 아이템이 아닐까 싶다.
개인적으로 개와 늑대의 시간에서 가장 캐릭터와 맞아 떨어지는 수트 스타일을 보여주는 인물은 바로 정부장(김갑수)라고 생각된다. 국정원 간부라는 개의 특성을 가졌으면서도 순간순간 냉철하게 사람을 이용해 먹는 늑대로 돌변하는 정부장의 수트 컨셉은 오로지 스트라이프 하나로 귀결된다.

주로 모노 톤 수트를 애용하는데 단연 그레이, 그것도 잔잔하게 스트라이프가 들어간 것을 선호한다. 보통은 화이트 셔츠를 매치하지만 때로는 셔츠마저 스트라이프인 경우도 있다. 밋밋한 수트의 포인트는 당연하게도 타이. 하지만 이 타이마저도 컬러풀한 사선 스트라이프 패턴인 경우가 대부분이고 간간히 등장하는 다른 타이들도 무조건 규칙적이고 일정한 패턴을 가지는 것이 특징이다.

20년 넘게 함께해 온 부하 직원을 잃었을 때마저도 냉정을 잃지 않고 아버지를 잃은 수현에게 오히려 요원으로서의 임무를 강요하는, 어찌 보면 잔인하고 지독하게 이성적인 캐릭터가 바로 그라는 걸 생각하면 일련의 규칙성과 지적인 요소를 상징하는 스트라이프와 정부장의 만남은 그야말로 환상의 조화. 게다가 나이를 먹을수록 빛을 발하는 중견배우 김갑수의 포스와 호리호리한 체격이 더해져 튀지 않으면서도 완벽한 정부장 스타일을 만들어낸다.

느와르의 매력은 남자들의 피 터지는 복수혈전에 있지만, 누가 뭐래도 느와르의 꽃은 아름다운 비련의 여주인공이다. 거친 액션이 난무하는 가운데 고고히 빛나는 그녀들의 아름다움이야말로 어두운 화면에 한 가닥 서정미를 더하는 화룡점정이기 때문. 하지만 그런 면에서 개와 늑대의 시간의 서지우(남상미) 패션은 어딘지 모르게 2% 부족한 느낌을 지울 수 없다.

드라마 초반에 그녀가 입고 나왔던 티셔츠와 진의 매치, 루즈한 원피스 류는 특유의 발랄한 느낌을 살리는 데 적격이었는데, 특히 태국 해변에서 입었던 비치 원피스는 은근히 글래머인 남상미의 몸매를 돋보이게 만들면서 시원한 트로피컬 프린트로 이국적이고 청순한 매력을 더하는 베스트 아이템이었다.

하지만 드라마가 본격 궤도에 오르고 지우가 완전한 성인으로 등장하면서 그녀의 스타일은 방향을 잃은 듯하다. 아트 디렉터라는 전문직을 강조하기 위한 목적인지 하나로 묶는 포니테일 헤어와 길이감 있는 옐로우 컬러의 셔츠류에 베스트나 롱 재킷을 매치한 룩을 주로 선보이기 시작했다.

특히 옐로우 컬러는 극 중 서지우의 메인 컬러인 듯 드라마의 포스터에도 등장하고 극 중에서도 정말 여러 번 등장하는데, 볼륨감 있는 몸매를 가진 남상미에게는 썩 좋은 컬러선택이 아닐 뿐더러 서지우가 명랑 쾌활한 캔디 캐릭터가 아니라 운명의 소용돌이에 빠진 여주인공인데 굳이 옐로우 같은 원색을 강조해야 할 필요성이 있을까 싶다.

그러나 비극적인 사랑의 주인공이라는 서지우의 캐릭터에 가장 안 어울리는 아이템은 따로 있었으니 다름 아닌 버뮤다 팬츠다. 옐로우 컬러만큼이나 자주 등장하는 이 어중간한 무릎 길이의 매니시한 팬츠들은 분위기 안 나는 포니테일 헤어와 어우러져 열심히 일하는 커리어우먼 룩으로는 마땅할지언정 정작 느와르의 히로인이라는 캐릭터 본연의 매력을 삭감시킨다. 팔다리가 슬림하지 못한 그녀의 단점을 부각시킴은 물론이고 말이다.

그에 반해, 청방의 실력자 마오의 애인으로 등장하는 샤오밍의 섹시한 스타일은 보는 사람의 시선을 확 사로잡는 매력이 있다. 패턴이 화려하고 몸매가 강조되는 미니 드레스나 에스닉한 분위기를 풍기는 치파오 룩은 관능적인 정부 스타일의 정석이고, 장만옥을 연상시키는 눈꼬리를 살짝 치켜 올린 스모키 메이크업은 매혹적이면서도 속을 알 수 없는 샤오밍의 매력 포인트를 업시킨다. 무엇보다 그녀의 룩에는 느와르의 정체성에 부합하는 드라마틱한 요소가 있다는 것이 가장 큰 장점.
점점 알 수 없는 결말을 향해 치닫고 있는 <개와 늑대의 시간>을 지켜보며 드는 생각은 여러 가지다. <부활> <하얀거탑> <마왕> <히트> 에서 <개와 늑대의 시간>으로 이어지는 장르 드라마의 리스트를 바라보며 드디어 한국에서도 이런 짜임새 정교한 드라마를 만날 수 있게 되었다는 기쁨과 함께, 주연들의 패션 하나하나가 장르적 정체성을 대변하면서 보다 스타일리시한 비주얼을 만들어내는 완벽한 드라마를 하루빨리 보고 싶다는 아쉬움이 공존한다. <개와 늑대의 시간>이 꽤 잘 만든 드라마라는 사실은 분명하지만 주연들의 패션에서 약간의 아쉬움이 남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사실이니 말이다.
하지만 사실 지금은 아무래도 좋다. 복잡한 문제는 시간의 흐름에 따라 발전해 나갈 우리나라의 드라마 관계자들에게 맡겨두고, 일단 오늘 밤에는 그 누구도 결말을 예상할 수 없는 <개와 늑대의 시간> 마지막 회를 닥본사해야 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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